화순 출신 정혜숙 시인, 『거긴 여기서 멀다』 시조집 출간

화순 출신 정혜숙 시인, 『거긴 여기서 멀다』 시조집 출간
시인의 말 “영영 닿지 않아도 좋습니다 멀리 있어 더 아름다운 당신”
“유한자로서 겪는 상실감과 좌절, 슬픔... 심미적으로 보편화돼”
‘여기’와 ‘거기’를 통합 관념할 수 있는 전일全一한 세계관 지닌 작가
  • 입력 : 2022. 06.21(화) 06:56
  • 김지유
정혜숙 시인의 시조집 『거긴 여기서 멀다』가 <책만드는집 시인선 198>로 출간됐다. 제4부로 구성된 시조집에서 정혜숙 시인은 <“나 여기 있어요”/귀엣말하듯/기척을 합니다/저만치 걸어가는 당신/우리의 간격은 좁혀지지 않고/마침내 저녁 언저리입니다/영영 닿지 않아도 좋습니다/멀리 있어 더 아름다운 당신입니다>라는 짧은 시구로써 ‘시인의 말’을 대신했다.

염창권 교수는 작품과 시인에 대해 “정혜숙 시에서 ‘문장’은 생의 행로와 같으며, ‘행간’은 존재의 균열이 발생하는 틈이며, ‘미간’이나 ‘안색’은 고독한 일상의 형편을 표상하고, ‘인중’에 새겨진 시간은 운명적인 힘이다. 홑겹으로 맑고 투명하게 널어놓은 이미지들 속에서 백지처럼 얇아진 배후의 세계가 얼비치며 내색한다. 이때 유한자로서 겪는 상실감과 좌절들을 사적 영역을 넘어서 관계적 질서를 불러오는데, 이를 통해 슬픔은 심미적으로 보편화된다.”고 했다.

이어 “부음으로 전달되는 배후의 세계를 고통이나 두려움이 없이 심미화하는 것은 ‘여기’와 ‘거기’를 통합하여 관념할 수 있는 전일全一한 세계관에서 기인한다. 또한 좌절이 분노나 원한의 감정으로 이행하지 않고 심미화되는 것은 그가 가진 특유의 세계관에서 발생하는 것으로, 현존을 영원의 포대기에 감싸인 배아처럼 보았기 때문일 것.”이라고 했다.

정혜숙 시인은 1957년 화순 춘양에서 출생했다.
2003년 중앙일보 중앙신인문학상으로 등단 후 시조시학 젊은시인상, 무등시조문학상, 오늘의시조시인상, 중앙시조대상 신인상 등을 수상했다. 2012년과 2021년에는 서울문화재단 문학창작지원금을 받았다.
시조집에는 『앵남리 삽화』 『흰 그늘 아래』 현대시조 100인선 『그 말을 추려 읽다』가 있다.


「거긴 여기서 멀다」

에스프레소 한 잔으로 오늘도 잠은 멀다
무표정한 시간은 여전히 나를 비껴가고
어둠의 봉인을 뜯는
흰 달이 높이 떴다

무딘 칼날에도 마음은 움푹 파이고
소리 내어 울지 않아도 옷섶이 흥건하다
지명을 모르는 바람
위로처럼 건 듯 분다

거긴 여기서 멀다
그리운 은적사
도라지꽃 보랏빛 문장 아직 거기 있는지···
때로는 네가 그립다
숨어 살기 좋은 곳

「해 지는 쪽을 향해 걸었던 적이 있다」

해 지는 쪽을 향해 걸었던 적이 있다
먹물 같은 어둠을 찢으며 흰 달이 돋았고
시간의 부축을 받아
지금에 이르렀다.

적응을 묻는 질문에 편안하다고 하면서
출가한 지 6년째라고 담담하게 말했다.
통증이 무지근하게
명치를 짓눌렀다

어느 봄날 불현 듯 출가를 결심하고
몇 잔 술의 힘을 빌려 어머님께 고했다 했다
도처가 겨울이었던 때가
내게도 있었다
김지유 hsjn2004@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