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토피아를 꿈꾸며,
공동체주의를 향하여


민주화운동가 출신인 김도연은 1983년 자신이 세운 출판사 공동체에서 “분단 극복의 문화운동”을 제창하며 무크지 『공동체 문화』를 창간했다. 그는 ‘공동체 문화’라는 말이 제3세계 실천적 민중문화운동의 본질을 나타내는 개념이라고 보면서, 공동체 의식의 회복을 통해 민주주의와 민족 통일에 이르는 과학적 방법론을 모색하기 위해 이 무크지를 창간했다고 밝혔다.

박현채는 1984년 12월에 발간된 『공동체 문화』 제2집 중 ‘공동체를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특집에 재야 민주화운동가 백기완과 함께 기고했다. 그가 쓴 글의 주제는 ‘공동체론, 공동체 운동’이었다. 박현채는 1871년의 파리, 동학혁명기의 집강소(執綱所), 1950년대의 지리산, 1980년의 광주 등에서 형성된 코뮌에 관심이 많았다. 그는 “모든 인류가 반드시 경험한, 그리고 지금 경험하고 있는 사회생활의 양식”을 공동체라고 보았다. 즉 그의 공동체 개념은 작게는 가족으로 환원될 수 있지만 크게는 마을 또는 민족으로 확대될 수 있는 개념이었다.

사실 동양에서는 공동체 이론이나 공동체 실천운동이 오래전부터 전개되었다. 이는 이상향을 지향하는 유토피아 사상으로도 이어졌다. 한편 서양에서는 토머스 모어(Thomas More, 1478~1535)의 『태양의 도시』가 출간되면서 한 차례 주목받은 바 있다. 또한 기독교 운동에서도 원용되어, 가난한 이들에게 ‘약속된 땅’과 ‘새로운 왕국’을 기약함으로써 미래에 대한 희망을 주었다. 이러한 공동체에 대한 구상은 1789년 프랑스혁명의 한 흐름이기도 했던 공상적 사회주의에도 영향을 미쳤다.

박현채는 흔히 좌파, 즉 사회주의 이념가로 분류된다. 본인도 1990년대 초반, 동구 사회주의권의 붕괴를 보면서 큰 충격을 받고 정신적인 좌절을 겪었다고 한다. 20세기에 자본주의와 사회주의가 대립하고 있을 때 그가 사회주의적인 지향을 보인 것은 분명하다. 그의 많은 글들에서도 사회민주주의에 대한 지향성이 다분히 엿보인다. 하지만 박현채 사상의 핵심은 현실 자본주의와 사회(공산)주의를 뛰어넘는 이데올로기로서 공동체(코뮌) 정신이 아닐까 싶다. 그런 의미에서 ‘공동체론, 공동체 운동’은 박현채에게 대단히 중요한 주제였다.

농업 문제에 관심이 많았던 박현채는 1960년 4월혁명 이후에 ‘협업농’ 이론을 제기하기도 했다. 지나치게 영세한 농업 구조로는 농민의 삶을 향상시키기 어려우므로, 이러한 상황을 탈피하기 위해 협업 체제가 필요하다는 주장이었다. 임동규의 인터뷰를 통해 박현채의 생각을 살펴보자.

이론적으로 한국농업 빈곤의 원인이 구조적인 데에 있다. 지나치게 영세한, 규모의 영세성, 이런 것이 생계 농업 이상을 벗어날 수 없지 않느냐, 그래서 어느 정도 농업이 구조적으로 생계 농업에서 기업농으로 이렇게 되어야 하는 거 아니냐. 그러려면 규모가 커져야 되지 않겠느냐, 좌우간 그런 취지로 문제제기가 됐고, 그러면 열 농가가 합쳐서 경종 농업이면 경종 농업대로 키워서 하고, 그러면 남는 잉여 노동은 어떻게 할 것이냐, 그러면 협업으로 축산도 하고 여러 가지, 말하자면 내포화, 경영의 내포화를 통해서 규모를 점차적으로 키워 나갈 수밖에 없지 않느냐 그런 것이었는데 (……)

- 「「KBS 인물현대사」 인터뷰 녹취록」(임동규의 인터뷰), 『박현채 전집』 7, 해밀, 2006, 517쪽

하지만 5∙16쿠데타 이후 ‘멸균실’ 수준의 반공 체제에서는 협업농과 같은 농업생산 구조 문제를 거론하는 것 자체가 불온시되었다. 이러한 측면에서 본다면 ‘협업’이란 수십 년 동안 박현채의 마음속에서만 숙성되어온 꿈인데, 이것이 ‘공동체 이론’으로 펼쳐진 것이다.

박현채는 동서양 공동체의 역사를 추적했는데, 한국의 공동체로는 두레패, 군포계(軍布契), 대동계(大同契), 향약(鄕約) 등을 그 예로 들었다. 그는 계급이 자리 잡지 못한 공동체에서 수확물은 기본적으로 자기 노동을 통해 얻은 것이므로, 수확의 증대는 결국 자기 노동의 증대를 뜻한다고 보았다. 그리고 공동체 안에서 인간의 일생이라는 시간성의 측면에서 본다면, 결국 공동체 자체의 재생산, 즉 영원성이 보장된다는 것이 박현채의 공동체에 대한 인식이었다.

그는 공동체 이론이나 공동체 운동을 당대의 실천적 과제로 여겼지만, 당시로선 경험이 부족했고 일반화되지도 않았으며 이론적으로도 정립되지 않은 초보 단계라고 보았다. 그렇다면 박현채가 구상하는 공동체의 실체는 어떤 것이었을까? 그는 계급 분화가 없는 원시공동체에서는 공동체적인 삶이 주어지지만, 계급 사회에 이르면서 수탈과 억압의 삶이 시작된다고 보았다. 원시공동체의 민중적 성격, 즉 공동체의 긍정적 성격이 역사 발전 단계에 따라 달라진다고 본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박현채에게 공동체란 그야말로 유토피아였다. 그래서인지 그는 유독 토머스 모어를 좋아했다. 1981년 자유문고사에서 출간된 『내가 생각하는 멋진 사람들』은 각계 인사 20명이 각자 멋진 사람들을 추천해서 쓴 글을 묶은 책이다. 문학평론가 김병걸은 「볼테르와 볼리바르」, 작가 이문구는 「민중의 벗 이토정」, 언론인 홍사중은 「자로(子路)」를 집필, 수록했다. 여기에서 박현채는 토머스 모어를 추천하고 그에 대한 글을 썼다.

박현채는 에라스무스의 말을 빌려 모어를 “순백한 눈보다도 맑고 깨끗한 때 묻지 않은 양심의 사람이고 영국에서 일찍이 볼 수 없었던 천사적 지성을 지닌 사람”이었다고 소개한다. ‘때 묻지 않은 양심의 사람’이라는 평가는 박현채 자신도 지향하는 인물상이었다. 그가 모어를 ‘멋진 사람’으로 꼽은 것은, 모어가 권력에 굴하지 않고 신념을 좇아 죽음도 마다하지 않는 지성과 용기를 지녔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와 함께 모어가 『유토피아』의 저자였던 점도 그에게 매력적으로 작용하지 않았을까 싶다.

모어는 이상과 현실의 괴리 가운데서 ‘유토피아’를 제시했지만, 군주의 이해관계를 좇아야 하는 현실이 이상의 실현을 가로막고 있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그는 불편이 따르더라도 자기 능력과 에너지를 공공의 이익을 위해 써야 한다고 결심하면서 자기 책임을 강조한다. 이러한 모어의 생각은 박현채에게 상당한 깨달음을 주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박현채는 모어에 대해 “인문학자로서 기지와 여유를 준 인물이며 개인의 양심을 지키기 위해 일어선 위대한 순교자로 존경할 만한 인물”이라고 평했다.

누구보다 치열하게 현실의 변혁을 추구했던 박현채를 ‘유토피아론자’라고 한다면 납득하지 않을 사람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후대에 크게 변질된 ‘유토피아’나 잘못 번역된 ‘이상주의’와는 달리 ‘공동체’라는 용어를 대입한다면 달라질 것이다. 박현채는 그렇게 자신의 이상을 펼치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