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선재 갤러리에서 개최된 개인전 <돌아·봄>. 전시된 작품 <만연사의 설경> 앞에서 웃고 있는 목운 오견규 화백.

봄입니다.
물 흐르고 꽃 피는 시간입니다.
지나간 겨울과 가을, 그리고 여름을 돌아 봅니다.
농부가 밭을 고르듯 붓을 다듬고 먹을 갈았습니다.
그리고 50여 성상이 흘렀습니다.
막상 희수喜壽에 이르렀으나 별다른 것 없고
닳아진 벼루와 헌붓, 저를 닮은 작품 몇 점만 남았습니다.
(…)

- 2024년 춘 삼월 일지춘실에서 목운 오견규 배


희수가 되도록 작품 활동에 임해온 목운 오견규 화백이 50여 년의 수묵화 인생을 집적한 화집을 발간하고, 출판기념 개인전 <돌아·봄>을 개최했다. 반백 년에 이르도록 수행 정신으로 묵묵히 그림을 그려 온 ‘매화를 닮은 화가’, 오견규 화백의 세계관을 인터뷰를 통해 엿본다.<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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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못 본 그 꽃

코끼리도 자기가 지나온 길은 잊지 않는다고 합니다. 지나온 길을 잊어버리면 다음에 같은 길을 가더라도 모르게 되니까요. 하물며 사람은 어떻겠습니까. 인생은 짧습니다. 남길 땅도, 재산이랄 것도 없습니다만 ‘기록’ 문화라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지요. 기록해 남기면 자식들에게, 많은 사람에게 기억될 수 있을 테니까요.

작품 앞에서 동양의 성인들과 일화를 소개하는 목운 오견규 화백.

옛사람들은 자연에 인생을 빗대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어젯밤 비에 꽃이 피었는데 오늘 아침 바람에 꽃이 졌네. 아, 가련하구나. 이 한 봄날의 일이 비바람 속에 오고 가는구나.’ 이런 시적 표현처럼 인생은 자연과 닮았습니다. 저는 이제 산에서 내려오는 시기이지요. 마음을 내려놓지 못하면 내려오는 길 내내 무거워서 괴롭지 않겠습니까? 지금은 꽃 피고 무르익는 것을 가벼운 마음으로 되돌아보며 내려오는 중이니, 좋아요.


▲ 군자는 궁핍함을 견딜 수 있지만 소인은 함부로 행한다.

‘기록’ 중에서도 ‘회고록’이라고 많이들 말하잖아요. 돌아본다는 뜻이지요. ‘되돌아보다’라는 의미와 ‘봄이 돌아오다’라는 의미를 모두 담아 전시의 제목을 〈돌아·봄〉으로 정했습니다.

강조하고 싶었던 말이 있었는데, ‘군자는 궁핍함을 견딜 수 있지만 소인은 함부로 행한다.’라는, 논어의 위령공 편에 나오는 말입니다. 소인이 함부로 행한다는 것은 가난을 견디지 못하고 담을 뛰어넘는다는 뜻입니다. 정해진 선을 넘어 마음을 해치고 상처를 주기도 하고. 저는 군자가 되려고 했으니, 가족들이 속을 태우기도 했지요.

아산 조방원 선생님과 부자지간처럼 막역하게 지냈습니다. 각별한 애착이 있다 보니, 선생님의 가르침이 지금도 제게 뿌리 깊게 남아 있어요. 군자의 뜻, ‘여리박빙’의 자세로 수행하는 자세.

작품 앞에서 동양의 성인들과 일화를 소개하는 목운 오견규 화백.

그림은 수행과도 같습니다. 수행이란 자신의 영리를 위해 하는 것이 아닙니다. 시대의 상처에 아파하고 잘못된 세태에 대해 분노하는 마음으로 수행해야 합니다. 바른말을 할 줄 아는 것이야말로 작가의 정신이지요. 그림에는 어떻게든 시대가 담기게 됩니다. 수행하는 자세가 저를 작가로서 버티게 하고, 이 모든 것은 스승의 큰 영향입니다.


▲ 산수(山水)에 뜻을 둔 문인화가, 목운(木雲)

본래 무석(撫石)을 아호로 삼았는데, 돌을 어루만지듯 작품을 하겠다는 의미였습니다. 시간을 들여서 돌에 조각하듯 그림을 그리겠다는 뜻을 담은 것인데, 어느 순간 바꾸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스승님이 편찮으셔서 입원하고 계실 때 저를 ‘무석, 무석’하고 부르시는 어감이 좋지 못했습니다. 끝이 막힌 느낌이 들어서요.

저는 나무를 좋아합니다. 자연을 대표하는 게 바로 나무라고 할 수 있지요. 인생은 자연을 닮았지만, 사람은 나무와는 대조되기도 하지 않습니까. 항상 자리를 지키면서도 평온한 나무의 이미지에, 언제나 변하는 구름을 붙여 아호를 목운(木雲)으로 정했습니다. 바람 불고 비 내릴 적마다 사물은 달라진다는 불교 정신과 노자의 정신을 담고 싶었어요.


▲ 여백이란 곧 여지, 편안한 해찰

노자께서 오미구상(五味口爽)이라고 하셨지요. 오색은 사람의 눈을 멀게 하고, 오음은 사람의 귀를 멀게 하며, 오미는 사람의 입을 상하게 한다고 합니다. 너무 좋은 것, 너무 화려한 것만 찾다 보면 사람은 무자비해지지만, 결국은 이상에 다다르지 못하고 허무해집니다.

왼쪽에서부터 <적(寂)>, <매화를 심은 뜻은>, <홍매와 의자>, 목운 오견규 作

<청풍>, 목운 오견규 作

먹의 검은 색은 하늘에 비유되기도 합니다. 현덕(玄德)이라는 표현은 하늘과도 같은 큰 덕이라는 뜻이지요. 삼원색을 섞으면 먹빛이 되고, 스님들은 잿물을 들인 옷을 입습니다. 수묵의 색은 가장 순화되고, 통합된 색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이것이 수묵의 가장 큰 매력이 아닐까요?


▲ 어두운 시대, 향기 나는 사람으로

우리는 자기 발자국만큼만 밟고 지나가요. 그러나 높은 산꼭대기에 발자국 표시를 해줘도, 여지가 없으면 선뜻 갈 수 없습니다. 한국화의 여백은 이 여지와 비슷한 위치에 있습니다. 여기서 다시 노자의 말씀을 인용하게 되는데요, 지백수흑(知白守黑)이라고. (먹물이 닿지 않은) 여백을 알고 먹물(이 있는 자리)을 지킨다는 뜻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여지, 즉 여백을 알게 되면 내 그림도 살아나게 되는 것이지요.

예전에 아내의 직장 동료가 제 매화 그림을 한 점 사고 싶다며 꽤 큰 돈을 내밀어 온 일이 있습니다. 그래서 한 열흘 가까이 시간을 들여 열심히 그렸지요. 아내에게 보여줬더니 반응이 영 시원찮은 것 아니겠어요? 이상하다, 하고 화실 한켠에 뒀는데 아무리 봐도 내 눈에는 좋게만 보이는 거예요. 그런데 또 열흘이 지나고 보니, 꽃을 너무 많이 달아 놓은 겁니다. 마치 오원 장승업의 일화처럼, 거금을 보고 욕심이 생겨 여백이 하나도 없는 그림을 그린 것이지요. 수행의 자세가 흐트러져서는 여백에 뜻을 담을 수도, 여지를 남길 수도 없는 모양입니다.

<만연사의 설경>, 목운 오견규 作

선생님(아산)께서는 선비라면 매화를 좋아하고 매화처럼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앞선 일화에서처럼, 세상은 혼란하고 어두운데 내 그림이나 팔아먹을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지요. 시대에 함께 아파하고, 매화 같은, 선비 같은 사람이 되고 싶어요. 어둡고 차가워도 향기를 잃지 않는 사람.


▲ 일품의 진정한 가치, ‘편안함’

작품 관련해서나, 한 번씩 글감이 떠오를 때 써놓은 게 좀 있습니다. 작가 노트라고 해야 할까요? 앞으로도 이제 좀 쓰려고요. 후대에 남길 수 있는 ‘기록’문화에 대해 앞서 논하기도 했으니, 앞으로 그릴 작품과 새로 쓸 글들을 취합해서 화문집을 출간할까 싶습니다. 많이는 아니고, 지인들과 함께 나눠 갖고 싶어요.

옛말에 사품이라는 게 있습니다. 신품, 묘품, 능품. 그보다 가장 좋은 것을 일품(逸品)이라고 하지요. 여기에서 일은 한 일(一)자가 아닌 편안할 일(逸)자를 씁니다. 인간의 가장 멋진 모습은 편안한, 평이한 모습입니다. 예수님도, 부처님도 가장 평범하고 가난한 모습으로 나타나시잖아요.

남도에는 큰 산이랄 것도, 장엄한 풍경이랄 것도 없으니 제가 그리는 그림들도 비산비야예요. 산인 듯, 논인 듯, 언덕인 듯 그리면서 소담스러운 집이 있고 논밭이 있고 옹기종기 지내는 모습. 화순 땅을 돌아보면 너무 좋지 않나요? 그런 곳에서 삶을 살면 사람들이 유순하게 되거든요. 평이함은 작품을 편안하게 만들고, 평담의 경지에 오르는 것이야말로 성인이라 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매화를 심은 뜻은> 外 작품 2점과 목운 오견규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