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을 하루 앞두고, 딸이 하루 우리 집에서 머물며 명절을 함께 준비하기로 했다. 그러나 하늘의 뜻은 달랐다. 갑작스러운 폭설, 그리고 공무원인 사위의 비상근무. 자연 앞에선 계획이 부질없었다. 딸이 이제 곧 돌을 맞는 아들을 챙기며 이 집까지 오는 건 무리다. 결국, 우리 부부가 딸 집에 가기로 했다.

아내는 서둘러 이것저것을 챙겼다. 손길마다 사랑이 깃들었다. 설빔을 딸 집으로 옮기려니 한두 개가 아니었다. 우리 둘이 들어도 손이 모자랄 정도로 바리바리 싸 들고 길을 나섰다.

문을 열자마자 손주는 두 팔을 번쩍 들고 우리를 반긴다. 그 작은 손을 허공에 흔드는 모습이 어찌나 귀여운지. 아이의 웃음소리는 겨울바람을 밀어내는 듯했다. 손주를 보는 기쁨이란 이런 것인가. 점심을 함께 나누고, 나는 여유로운 오후 산책을 나선다.

강변으로 향하는 길, 눈은 여전히 세상을 덮고 있다. 강둑에서는 아이들이 신나게 눈썰매를 타며 깔깔댄다. 햇살이 새하얀 눈 위로 부서진다. 문득, 내년이면 손주도 저 아이들처럼 눈썰매를 타겠구나 싶었다. 그 생각에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번진다.

그러나 마음 한편에서 묘한 아이러니가 스쳐 갔다. 아이들은 눈을 기다리고, 아버지는 눈이 오면 비상근무에 나가야 한다. 지방공무원의 애로사항이다. 남들 쉬는 연휴에 안타까운 일이다. 아버지와 아들 세대가 다르면 바라는 것도 다르고, 역할도 다르다. 삶이란 그런 것일까. 그렇게 생각하며 천천히 강변길을 걷는다.

강물은 얼지 않고, 찰랑이며 흘러간다. 겨울바람에 억새가 흔들린다. 사람들은 흔히 갈대라 부르지만, 그것은 억새다. “으악새 슬피 우는” 노랫말이 떠올랐다. 슬피 우는 새가 아니라, 바람에 흔들리는 억새가 내는 소리다. 바람에 몸을 맡기고, 쓰러질 듯 다시 일어서는 억새. 그 모습이 왠지 우리의 삶과 닮아있다.

평소라면 사람들로 북적였을 산책길이 한산하다. 명절 대목이라 다들 집안에 머물러서일까. 조용한 길을 걸으니 인생이란 무엇인가, 문득 생각에 잠긴다.

어린 내 아이를 데리고 할머니를 찾아뵙던 시절이 엊그제 같은데, 이제는 그분들이 떠나고, 내가 손주의 할아버지가 되어 강변을 걷고 있다. 세월이란 참 빠르다. 살아온 시간보다 살아갈 시간이 짧아졌다는 걸 자주 실감한다. 그런데도 마음속엔 여전히 이런저런 욕심이 자리 잡고 있다. 욕심을 덜어내야 하는 걸까, 아니면 하루하루를 더 의미 있게 살아야 하는 걸까.

눈발이 점점 거세진다. 앞이 흐릿해질 정도로 휘몰아치는 눈보라 속에서도 강둑의 아이들은 여전히 신이 나 있다. 내년에는 손주도 저 아이들처럼 뛰어놀겠지. 하지만 그 시간이 깊어질수록, 나는 인생의 끝을 향해 조금씩 더 다가가고 있는 것이겠지.

돌이켜보면, 나의 어머니도 그랬을 것이다. 아들이 가정을 꾸리고, 손주들이 자라 시집을 가고 증손주를 볼 무렵, 어머니는 세상을 떠나셨다. 그리고 지금, 나는 어머니가 바라보던 그 자리에 서 있다.

시간이란 참으로 소중하다. 순간순간이 모여 인생을 이루고, 우리는 그 한순간을 살아간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걷는다. 글을 쓴다. 그리고 살아간다.

한광용
화순저널 논설위원
전남대학교치과병원 아트스페이스갤러리 디렉터
화순군립요양병원 서암갤러리 디렉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