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 박현채의 자아이자 사상이고 이념이자 이상 『박현채 평전』 7장 왕성한 저술 활동으로 이론을 펼치다 화순저널 hsjn2004@naver.com

2021년 12월 03일(금) 18:40

민중문학으로
관심을 확장시키다

1980년대 중반을 전후하여 야당, 학생, 지식인, 노동자들의 저항이 격화되면서 전두환 정권은 점차 수세에 몰리기 시작했다. 쿠데타와 광주 학살의 태생적 범죄를 안고 태어난 전두환의 5공 정권은 시민들의 줄기찬 저항을 폭압적으로 다스렸지만, 그때마다 한계에 봉착했다. 저항 세력은 점차 조직의 확대와 연대를 통해 민주화를 요구하고 시민들의 참여를 끌어냈다. 1980년대 한국 사회의 민주화 투쟁은 해방 이후 가장 격렬하고 줄기찬 민중운동으로 전개되었다. 사상사적으로는 동학혁명, 3⋅1운동, 4⋅19혁명, 광주항쟁으로 이어지는 저항의 맥락이었다.

1970년대 동아⋅조선 언론 자유 투쟁 과정에서 쫓겨난 언론인들과 학생운동 출신 엘리트들이 출판계에 진출하면서 1980년대 중반에는 각종 이념 서적, 무크지, 계간지가 속속 발간되었다. 정부는 금서 조처와 세무 조사 등의 탄압 정책을 펴기도 했지만, 출판계는 위축되지 않고 정권과 싸우면서 역설적이지만 그 어느 때보다 호황기를 맞게 되었다. 그동안 묶여 있던 외국의 각종 금서가 출판되어 비밀리에 팔렸고, 금제의 푯말이 찍혔던 국내 비판적 지식인들의 저서 역시 출판되어 일반인과 학생 및 노동자들의 필독서가 되었다.

박현채에게도 여기저기 원고 청탁과 강연 요청이 잇따랐다. 『창작과 비평』, 『실천문학』, 『기독교 사상』 등의 청탁을 받고 여러 편의 비중 있는 글을 썼다. 1980년대 초에 무크지로 출발한 『실천문학』이 1983년 제4권에서 ‘삶과 노동자 문학’을 특집으로 다루면서 박현채의 「문학과 경제」를 실었다. 이 평론에는 ‘민중문학에 대한 사회과학적 인식’이라는 부제가 붙었다. 경제평론가 박현채는 이 글을 계기 삼아 본격적으로 ‘문학과 경제’라는 주제로 사유의 지평을 넓혔다. 당ㅇ시에 민중문학론이 제기되어 지식인들의 관심을 모았는데, 이 영역에 박현채 역시 관심을 기울인 것이었다. 우선 민중문학에 관한 박현채의 인식을 살펴보자.

민중문학이 어떤 것으로 되어야 하느냐에 대하여는 여러 가지 논의가 있을 수 있으나, 나는 일단 민중문학의 사명이 다음과 같은 데서 주어질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곧 민중문학의 사명은 ① 역사적 진실을, ② 생활하는 민중의 쪽에 서서 민중을 대상으로 하여, ③ 주어진 사회적 상황에서 발현되는 삶의 고니와 인간적 요구를, ④ 감성적인 일상적 표현에서 추구하고, ⑤ 역사에서 민중의 사회적 실천에의 요구에 답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민중문학에 대한 이와 같은 규정은 문학과 경제와의 상호 관련을 보다 불가결한 것으로 하기에 이른다.

- 박현채, 「문학과 경제」, 『실천문학』 4, 1983, 99쪽

박현채의 민중문학에 대한 인식은 문학평론가 수준을 넘어선다. 그렇지만 자신의 ‘전공’은 어쩌지 못해서인지 이 평론에서도 문학보다는 경제 분야에 훨씬 치중된 서술을 선보였다. 또한 이 평론에서는 ‘민중’에 대한 그의 사회과학적 분석이 상당이 돋보였다.

오늘의 역사에서 민중은 바로 삶과 노동의 관계에서 노동으로부터 소외의 대상이 되고 사회적 생산에의 참여에서 배제된 노동하는 사람, 그리고 노동하고자 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에게 있어서 진정한 삶의 실현은 소외의 극복이다. 그것은 원초적인 삶과 노동의 관계를 되찾는 것이다. 인간의 역사는 이와 같은 삶과 노동의 관계에서 인간 간의 사회적 관계 때문에 삶과 노동이 원초적 관계에서 점점 멀어지면서 동시에 인간의 사회적 실천에서의 소외의 극복을 위한 보다 더한 시도를 강화해왔다. 역사에서 민중문학이 대두하는 것도 바로 이와 같은 보다 강화된 소외 극복을 위한 시도의 하나로서다.

- 박현채, 「문학과 경제」, 『실천문학』 4, 1983, 134쪽

‘민중’은 박현채의 자아이자 사상이고 이념이자 이상이었다. 백성⋅인민⋅국민⋅민중이라는 때마다 달라지는 용어와는 상관이 없었다. 이 땅의 주인이면서도 수탈을 강요당해온, 그러면서도 이 땅을 지켜온 사람들의 총칭이었다. 그는 민중의 해방을 위해서 빨치산이 되었고, 반체제 지식인이 되었고, 민족경제학자가 되었다. 늘 억눌리고 짓밟히고 쫓기고 궁핍에 시달리면서도 추구해온 가치였다.

박현채는 오랜 역사의 과정에서 소외되어왔던 민중이 이제 역사의 지평에 강력한 힘으로 자기 해방을 위한 시도를 하고 있다고 평했다. 그는 민중문학이 제기되는 것 또한 그런 노력의 일환이라고 보았다. 이에 총체적으로는 노동의 소외를 극복함으로써 삶과 노동의 원초적 관계를 회복하는 리얼리즘 문학을 민중문학의 사명으로 제시한다.

민중문학의 기치를 드높인 박현채의 평론은, 문학과 경제의 상관성을 논하면서 다음과 같은 비장한 메시지로 마무리된다.

오늘 우리 사회에서 민중 소외의 논리의 관철과 그것에 따른 민중적 상황은 이것을 거부하는 주체적인 민중적 노력의 낮은 수준에도 중요한 이유가 있다. 그리고 역사는 이해 당사자의 자기 해방을 위한 노력에서만이 진전을 이룩했다. 그런 의미에서 민중의 자기 해방, 삶과 노동의 원초적 관계의 회복을 위한 노력은 민족적 요구인 민주주의, 통일, 자주와 함께 우리의 문학, 우리의 경제학이 걸머져야 할 거부할 수 없는 과제로 된다.

문학가에게는 민중의 쪽에 서서 민중을 대상으로 하여 역사적 진실을 밝히고 민중과 더불어 새로운 창조에 참여하는 것은 또한 자기 해방의 길이 될 것이다.

- 박현채, 「문학과 경제」, 『실천문학』 4, 1983, 13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