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토리 문장주 화순저널 칼럼니스트 화순저널 hsjn2004@naver.com

2025년 11월 14일(금) 09:10

옛부터 우리 선조들은 좋은 것에는 ‘참’, 나쁜 것에는 ‘개’라는 단어를 붙여 썼다. 도토리 열매가 열리는 참나무과(Quercus)에 속하는 나무들은 단단해 쓰임새가 많다. 참숯, 술통(오크통), 목재, 코르크, 버섯 재배 등 다양한 용도로 이용된다. 또한 그 열매인 도토리도 나무 종류에 따라 모양과 크기가 제각각이다.

상수리나무의 옛 이름은 ‘토리’였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의주로 피난 간 선조는 쫓기느라 식사조차 제대로 하지 못해 도토리로 만든 묵으로 끼니를 대신했다고 한다. 이후 묵의 맛에 반한 선조는 환궁 후에도 ‘토리’로 만든 묵을 즐겨 먹었으며, 수라상에 자주 올라 ‘상수라’라 불렀다고 한다. 도토리를 ‘상실(橡實)’이라 부르던 것이 세월이 지나며 ‘상수리’로 변했다고 전해진다.

우리나라 산에는 과거엔 소나무가 가장 많았지만, 지금은 참나무가 가장 많다. 그런데 사과가 열리면 사과나무, 감이 열리면 감나무, 배가 열리면 배나무라 하는데, 왜 도토리가 열리는 나무는 ‘도토리나무’가 아니라 ‘참나무’일까?

도토리의 어원을 살펴보면, 1417년 고려 시대에 간행된 현존 최고(最古)의 의학서 『향약구급방』에 ‘저의율(猪矣栗)’이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여기서 ‘저(猪)’는 돼지를 뜻하고, ‘의(矣)’는 속격 조사 ‘의’, ‘율(栗)’은 밤을 뜻한다. 즉 ‘돼지의 밤’, 다시 말해 ‘돼지가 즐겨 먹는 밤’이라는 뜻이다.

이후 1481년 『초기두시언해』에서 ‘도토밤’ → ‘도토왐’을 거쳐, 1513년 『두시언해 중간본』, 1617년 『동국신속상감행실도』, 1690년 『역어운해』 등을 거치며 ‘도톨’에 접미사 ‘이’가 붙은 ‘도톨이’가 되었고, 16세기부터 지금의 ‘도토리’로 굳어졌다.

늦가을 산길을 걷다 보면 ‘툭, 툭’ 하는 소리와 함께 도토리가 낙엽 위로 떨어진다. 그 소리는 귀를 즐겁게 하지만, 가장 먼저 반응하는 것은 아마 다람쥐일 것이다. 겨울을 나기 위해 생존의 열매를 모아야 한다는 본능이 작동하기 때문이다. 한 통계에 따르면 참나무 한 그루에서 도토리가 최소 300개, 많게는 1만 개가량 열린다고 한다. 부지런히 모은 다람쥐는 따뜻하고 풍족한 겨울을 날 수 있다.

그러나 도토리를 먹는 짐승이 다람쥐뿐일까? 청설모, 멧돼지, 곰, 너구리 등도 도토리를 두고 치열한 생존 경쟁을 벌인다. 그래서 다람쥐는 쉴 새 없이 뛰어다닐 수밖에 없다.

옛말에 가뭄이 들고 흉년이 심할수록 도토리가 더 많이 열린다고 했다. 그래서 흉년에는 도토리가 좁쌀을 대신해주는 ‘선물 같은 열매’가 되었다. 예전에는 이런 식물을 ‘구황식물(救荒植物)’이라 불렀는데, ‘풀 초(草) + 망할 망(亡) + 냇물 천(川)’의 뜻처럼 풀 한 포기, 물 한 모금도 없는 황무지를 상징한다. 마치 보릿고개를 떠올리게 하는 단어다.

어린 시절, 덜 여문 보리를 불에 구워 손으로 비벼 먹으면 입 주변이 까맣게 되곤 했다. 그 시절 메뚜기나 개구리 뒷다리는 최고의 단백질 보충원이었다. 익지 않은 감을 소금물에 담가 떫은맛을 뺀 뒤 간식으로 먹기도 했다. 가을이면 도토리 가루로 묵을 쑤어 먹거나 산에서 주운 밤을 찌거나 구워 먹던 시절이었다. 도토리를 줍는 재미도 있었고, 많을 땐 몇 포대씩 지게에 지고 산에서 내려오기도 했다.

역사적으로 보면 도토리묵을 만들어 먹는 민족은 우리나라와 일본뿐이다. 임진왜란 때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인들이 두부와 함께 도토리묵을 만들어 팔면서, 일본에서도 묵이 전해졌다고 한다. 지금도 일본에서는 고치현(高知縣) 아키시(安藝市)에서만 묵을 만들어 먹는다.

우리말 속담 ‘개밥에 도토리’는 학교나 직장, 모임 등에서 어울리지 못하고 혼자 따돌림당하는 사람을 비유한 말이다. ‘개가 먹는 밥그릇 속의 도토리는 껍질이 단단해 먹지도 못하고 그냥 남겨둔다’는 데서 유래했다.

흔히 쓰는 ‘묵사발’도 본래는 ‘묵을 담은 사발’을 뜻하지만, 부정적으로는 얼굴이 심하게 맞아 뭉개진 상태를 비유할 때 쓴다. ‘외톨이(외돌토리)’ 역시 같은 어원이다. 이런 표현을 보면 우리 조상들의 예리한 관찰력과 비유 감각을 엿볼 수 있다.

도토리는 작고 보잘것없지만, 가을이면 야산 곳곳에 널려 있어 흔하고 천한 느낌을 준다. ‘도토리 키재기’라는 표현도 비슷하다. 보잘것없는 것들끼리 서로 잘났다고 다툰다는 뜻으로, 자칫 상대의 기분을 상하게 할 수 있어 조심스레 써야 할 말이다.

경상도에서는 도토리 꿈을 꾸면 ‘행운이 온다’고 믿었고, 서울에서는 ‘임신 중 도토리묵을 먹으면 유산한다’는 속설이 있었다. 한편 다람쥐는 1년에 두 번, 평균 2~3마리(많게는 4~5마리)의 새끼를 낳는다. 번식하랴, 겨울 준비하랴, 바쁜 일상을 보내는 다람쥐는 그야말로 ‘직장인보다 더 바쁜’ 동물이다.

과거 남획과 포획으로 다람쥐 개체수는 급감했다. 2025년 11월 현재, 국내 다람쥐의 공식 개체 수 통계는 없지만, 예전보다 눈에 띄게 줄어 야생에서 보기 어렵다. 다행히 1991년부터 야생 다람쥐 포획이 법적으로 금지됐고, 하늘다람쥐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돼 보호받고 있다.

예전에는 토종다람쥐를 잡아 일본에 팔거나, 그들의 겨울 양식인 도토리를 싹쓸이 채취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는 이런 행위가 사라져야 한다. 인간 중심의 이기적 생활방식에서 벗어나, 동물과 더불어 사는 인도적 자세가 절실히 요구되는 시대다.

먹을 것이 없던 사람들의 보릿고개를, 다람쥐마저 겪게 할 수는 없지 않은가.

문장주
화순저널 칼럼니스트
문의원 원장